호주 정착 탈북자 가족의 음력설 맞이 ‘두 번을 떠나 정착한 곳, 호주’

최금희 씨

Kumhee Choi. Source: Dijana Damjanovic/SBS News

선샤인 코스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최금희 씨는 14살에 가족과 함께 북한을 떠났다. 북한을 탈출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배고픔 때문이었다. 한국에 온 금희 씨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6년 전 서울을 떠나 호주로 이주했다. 무엇이 그녀를 다시 떠나게 했을까?


Highlights
  • 선샤인 코스트에서 스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탈북자 최금희 씨
  • 1997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4년을 보낸 뒤 2001년 한국 정착
  • 2016년 2달 된 딸과 호주로 이주해 TAFE에서 요리 전공
선샤인 코스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최금희 씨는 14살에 가족과 함께 북한을 떠났다. 북한을 탈출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배고픔 때문이었다.  한국에 온 금희 씨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6년 전 서울을 떠나 호주로 이주했다. 무엇이 그녀를 다시 떠나게 했을까?  

선샤인 코스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금희 씨에게 음력 설은 특별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행복했던 유년의 날로 기억됩니다.

금희 씨가 태어난 곳은 중국과 국경이 맞닿은 북한의 악명 높은 탄광촌 아오지.

늘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지만 설 명절만큼은 쌀 밥과 송편, 만두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SBS 뉴스 팀과 인터뷰 중인 최금희 씨
Kumhee is talking to SBS News Source: Dijana Damjanovic/SBS News

북한의 음력설 맞이

흔히 음력 설을 쇠는 민족으로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 등이 언급되는데 북한도 음력 설을 쇠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호주의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인 International College of Management, Sydney의 학자 레오니드 페트로브 박사는 80년대 후반까지 북한은 공식적으로 음력 설을 기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페트로브 박사입니다.

페트로브 박사: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이 전통을 기념하는 것을 금기시했는데 부분적으로는 혁명적 북한 사회가 부인할 오래된 봉건 관습과 연관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려 30만여 명이 북한에서 기아로 목숨을 잃은 고난의 행군 즉 대 기근 이후 사회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음력 설을 다시 기념하게 됐습니다.
 북한 전문가 레오니드 페트로브 박사
Dr Leonid Petrov in International College of Management, Sydney Source: SBS News
실제로 북한의 고 김정일 위원장은 2003년 공식적으로 민속 명절을 쇨 것을 지시했고 북한 내 음력설 풍습이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금희 씨는 선샤인 코스트의 자택에서 음력 설을 준비합니다.

오늘 금희 씨가 만드는 북한 명절 음식은 만두.

하지만 과거 북한에서 만들었던 만두와는 약간 다릅니다.

최금희 씨: 북한에서는 고기가 없어서, 야채와 두부만 넣고 만들어요.

한국에서는 설에 떡국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죠.

개성과 평양 등 비교적 한국과 가까운 북한 지역에서는 설에 떡국을 먹기도 하지만 북부 지역으로는 주로 만두와 송편을 만들어 먹습니다.

주 농작물이 쌀이 아니기에 북한에서는 70-80년대 때부터 비교적 귀한 쌀을 적게 들여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안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희 씨는 남한과 북한의 음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당도라고 합니다.

최금희 씨:  북한에서는 설탕이 귀해서 구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음식에 거의 설탕이 안 들어가고 그래서 중국에 갔을 때 설탕을 많이 넣는 걸 보고 놀랐고 그때 설탕을 알갱이 세서 넣었던 기억이 있어요.

25년 전 북한을 떠난 후 달달해  것은 금희 씨가 만드는 음식뿐만이 아닙니다.

금희 씨의 삶 또한 과거에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만큼 달달해졌습니다.

목숨을 건 탈북 “배가 고파서…”

일제 강점기 시절 원산의 대 지주였던 금희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올 정도로 엘리트였습니다.

한국 전쟁 중 할아버지는 목숨을 잃었고, 할머니는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선 북한에서 자본가라며 정치범으로 몰려 탄광촌인 아오지로 보내졌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출신 성분은 아버지에게 물려졌고, 아버지는 아오지 탄광에서 30년 동안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북한에서 찍은 최금희 씨와 가족들의 사진
Kumhee (bottom left) in North Korea with her family. Source: Supplied/Kumhee Choi
그리고 아버지의 출신 성분을 세습 받는 금희 씨 사 남매의 미래 또한 태어날 때부터 탄광 근로자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마 탄광에서 일하지 않았을까요? 아오지 탄광에서 태어났으니까 탄광에서 일했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못했을 것 같아요. 그게 가장 크죠. 최금희 씨
하지만 금희 씨의 가족이 정작 목숨을 건 북한 탈출을 단행한 것은 이런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

최금희 씨: 그때는 딱 하나였어요. 저희 부모님은 배고파서 먹을 게 없어서, 정말 먹을 게 없었어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제가 직접 저희 옆집 사람도 굶어죽고, 앞집 사람도 굶어죽고 그걸 보다 보니까 그때 고난의 행군 1차가 시작됐고 2차가 시작된다고 해서 저희가 나왔어요. 1997년도에 그때는 북한에서 배고파서 나온 거에요.

금희 씨의 어머니는 사흘간 굶고 있던 자식들을 위해 피를 팔기도 했습니다.

최금희 씨:  저희 엄마가 한 번은 저희가 너무 굶고 있으니까 밤늦게까지 안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강냉이 가루를 가지고 오셨어요. 나중에 봤더니 엄마가 병원마다 돌면서 피를 빼서 북한에서는 돈으로 팔 수 있거든요. 한 세 군데를 돌면서 피를 팔아서 그 돈으로 음식을 사서 왔더라고요.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금희 씨는 살기 위해 피를 팔아 식량을 마련해야 하는 당시의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합니다.
한복을 입은 최금희 씨
Kumhee Choi Source: Dijana Damjanovic/SBS News
최금희 씨: 그때는 사실 엄마가 음식을 갖고 온 걸 보고 바로 아직도 기억나요. 우리 아빠가 부엌에 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우리 언니가 가루로 반죽해서 수제비를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엄마가  보기에도 안 좋아 보이는 거예요. 피를 팔았다 얘기를 들으니까 아…희망이 없다.

결국 금희 씨  가족은1997년 겨울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14살 금희 씨의 목숨을 건 긴 여정이 이렇게 시작된 겁니다.

금희 씨의 부모님과 사 남매는 2001년 한국에 오기까지 중국에서 4년을 살았습니다.

금희 씨는 첫 바깥세상인 중국을 접한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최금희 씨: 다른 세상인 것 같았어요. 꿈인 줄 알았어요. TV 자체가 칼라였고 그 안에서 사람이 날아다니고, 동물이 날아다니고 진짜 사람이 날아다닌 줄 알았어요. 그런 걸 본 적이 없으니까 너무 신기했어요. 택시도 신기했어요. 택시를 탔는데 돈을 주니까 그것도 되게 신기했어요. 똑같은 차를 타는데 운전자가 다르더라고요. 그걸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죠.

한국을 가려던 몇 차례의 시도가 실패했고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습니다.

금희 씨 가족은 결국 도보로 중국 국경을 넘어 미얀마로 간 뒤 다시 태국으로 걸어갔습니다.

태국 난민 수용소에 수감된 뒤, 북송되기 직전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기적처럼 한국행이 성사됐습니다.

한국에서의 삶 “이제 이방인이구나…”

금희 씨의 남동생 금천 씨는 한국에 도착했던 때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최금천 씨: 생각했던 것보다 발전된 나라였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안전이 보장된 나라여서 마음이 놓였죠?

지난 4년간 그렇게 바라왔던 한국행이었건만 금희 씨는 자신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습니다.

최금희 씨: 가서는 사실은 조금은 힘들었어요. 우리 탈북자를 그렇게 반겨주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탈북자에 대한 시선도 되게 안 좋았고 그렇고, 그런 게 조금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이제 이방인이구나 이런 느낌 한국에서...

오자마자 하나원에 입소해 ‘탈북민’ 신분을 확인하는 조사를 받아야 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다른 말투 때문에 어딜 가나 ‘어디에서 왔냐?’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 탈북자를 그렇게 반겨주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탈북자에 대한 시선도 되게 안 좋았고 그렇고... 최금희 씨
한국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9월까지 한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 북한 이탈주민들의 숫자는 3만 3800명으로 파악됩니다.

실제로 많은 탈북민들은 한국 사회에서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고 북한 전문가 페트로브 교수는 말합니다.

페트로브 교수: 한국 사회에서 억양을 통해 바로 북한 출신인 게 밝혀지만 의심, 불신 종종 차별을 받고 육체적인 노동에 제한된 쪽으로만 고용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금희 씨는 탈북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지난 70년간의 적대관계에서 비롯됐고 말합니다.

최금희 씨: 사실 한국은 아직까지 북한에 대해서 적대적인 생각을 많이 갖고 있잖아요. 아직까지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그런 상황이고 그리고 사실 북한에 대해서는 늘 못 살고 그런 안 좋은 면만 다 인식하고 있는데 사실 호주에 왔을 때도 한국에서는 그런 인식이 굉장히 싫었거든요. 북한에서 온 게 사실 그렇게 나쁜 게 아닌데 어떤 사람들은  나쁘게 생각을 하더라고요. 그걸 감춰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퀸즐랜드에서 일식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금희 씨와 남편 사이먼 서 씨
Kumhee and her husband Simon Seo work together at their Japanese restaurant. Source: Dijana Damjanovic/SBS News
한국 사회에서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금희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건설회사에 성공적으로 취직해 6년간 근무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비교적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했지만 고도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늘 이겨내야 했습니다.

부모가 된 뒤 다시 한국을 뒤로…

2번의 유산 후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를 낳았던 금희 씨는 다시 한번 떠날 결심을 합니다.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북한을 떠났던 금희 씨.

이번에는 부모가 돼 남한을 떠나겠다고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최금희 씨: 사실 제가 북한에서는 산속을 뛰어다니고 들에서 놀고 그랬거든요. 그게 너무 행복했거든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고. 강에서 놀고 뒤에서 머루 따고 달래 캐고 그런 게 너무 좋았어요. 제 어린 기억은 그게 다에요. 북한에서 좋은 기억은 그게 다거든요.아이를 매일 학원에 보내고 아스팔트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저는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저는 아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더라고요.

최금희 씨: 제가 북한에서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그 나라 자체가 배고픈 나라여서 떠났다면 한국에서는 이제 내가 여기를 선택한 거죠. 내가 호주를 선택한 것 같아요. 근데 내가 스스로 앞의 삶을 봤을 때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난 어떻게 살고 싶을까 했을 때는 호주가 저한테는 최적이었어요.
아이를 매일 학원에 보내고 아스팔트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저는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저는 아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더라고요. 최금희 씨
그리고 금희 씨는 2016년 2달 된 딸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선샤인 코스트 시피 다운스에 왔습니다.

탈북자가 아닌 최금희로…

이민을 위해 금희 씨는 요리를 공부했고 2018년 일본 레스토랑을 개업했습니다.

한국에서 사무직으로만 일했던 금희 씨.

처음에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이 꺼려졌습니다.

최금희 씨: 사실 한국에서는 제가 식당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되게 고된 노동이고 저 임금이고…근데 한국에서는 아마 못 했을 거예요. 근데 여기 와서는 사실 제가 식당에서 힘든 육체적으로 일을 하면 그 보상이 정말 크더라고요. 이건 정말 기회의 땅이다. 원래 그래야 되고…

몸은 힘들지만 스트레스가 없는 식당 일이 좋다고 금희 씨는 말합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 최금희 씨
Kumhee working in her Japanese restaurant. Source: Dijana Damjanovic/SBS News
금희 씨의 식당 단골 고객들은 대부분 금희 씨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최금희 씨: 거의 대부분 모르죠? 대부분 “Where are you from?” 했을 때 “Korea”라고 할 때 대부분 “Of Course South” 그러더라고요. 만약 제가 진짜 “North” 라고 하면 그런 것도 “You are joking”이라고 하고… 코리아 라고 하면 아직은 한국이라고 알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다문화 국가 호주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되는 것이 전혀 두렵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최금희 씨: 사실 내가 여기 있는 게 North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다문화가 있잖아요. 그게 제가 못 사는 나라 전쟁이 있는 나라에서 왔다고 해도 거기에 대한 선입견은 안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게 참 다르더라고요.

실제로 금희 씨의 단골 고객들은 금희 씨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처음 듣고도 크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요.

되려 이를 좋게 바라봤습니다.

손님: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주 멋지네요.

손님: 그분들께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고 그런 북한의 공포에서 벗어나 여기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손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렇게 성장해 주변의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 실로 놀랍고 아릅답습니다.

금희 씨의 호주 이웃은 금희 씨의 색다른 배경을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웃: 북한 출신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놀랐지만 금희가 어떻게 호주에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회복 탄력성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놀랐습니다.  금희가 호주에 자신의 이야기와 문화를 가지고 온 것을 대단한게 생각합니다.

금희 씨는 호주에서는 자신을 탈북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최금희 그 자체로 봐 준다고 말합니다.

최금희 씨 : 인간관계도 금희라는 이 존재를 바라보고 거기에서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바라보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그게 힘들거든요. 네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북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는 북한 사람이라는 포커스를 맞춰서 생각을 많이 하더라고요.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근데 여기 와서는 그게 상관이 없더라고요.

호주에서 가장 작은 이민자 공동체

호주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호주 전역으로 스스로를 Korean 즉, 한국계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수는 12만 명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탈북자는 금희 씨 가족을 포함 극 소수에 불과합니다.

모두 퀸즐랜드에 살고 있는 금희 씨와 언니, 남동생 가족들은 현재 호주에 정착한 1호 탈북자 가족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금희 씨의 남동생 금천 씨입니다.

최금천 씨: *제가 처음 영주권을 땄을 때 영사관에서 북한에서 오신 분들 영주권 받은 분들 아직 없는데 처음이네요. 이런 말 들어서, 그때 제가 아직 많이 오지 않았구나 내가 그래도 선택받은 사람이구나 느꼈죠.
최금희 씨의 남동생 최금천 씨
Kumchun Source: Dijana Damjanovic/SBS News
탈북자 가족들은 호주 사회에 동화되는 것보다 남한 출신이 대 부분인 한인 이민자 사회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털어놨습니다.

하지만 금희 씨는 이제 굳이 한인 공동체에 들어가 본인을 확인받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최금희 씨: 오히려 제가 호주 와서 더 한국에서는 뭔가 그 사회에 끼려고 노력했던 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거를 제가 굳이 내가 끼려고 하지 말고 내 삶에 더 포커스를 두고 내 가족끼리 같이 시간을 보내자 이렇게 바뀌니까 전혀 없어요.  

페트로브 박사 또한 탈북자들은 영어를 배우고 다문화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말합니다.

페트로브 박사: 그러면 호주 내 남한 이민자 사회에 통합될 필요가 없고 남한 학교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간단하게 매일 호주에 도착하는 어느 소수 민족의 한 사람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한반도를 바라보며… “통일은?”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만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다가, 이제는 동해상으로 북한의 미사일이 날아드는 등 남북 관계는 최근 몇 년 새 급변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금희 씨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금희 씨는 실망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남북한이 떨어져 살았던 70년의 세월을 인정해야 된다고 지적하며, 절대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최금희 씨 : 이미 70년이란 세월이 있고 이미 탈북자가 한국에 왔을 때 느끼는 외로움, 외면감 그러면 통일이 됐을 때 더 문제가 심하죠. 사실은 그리고 이미 갭이 이미 북한과 남한이 이런 차이잖아요. 이제 거기서 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까? 이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야 어떻게 되는 통일이지 이렇게 합쳐지고 이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두 번을 떠나 마침내 집으로 선택한 이곳

금희 씨는 5살이 된 딸 지원이와 함께 오늘 집 근처 바닷가에 나왔습니다.

파도 소리를 듣고 해변을 걸으며 딸과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금희 씨.
Kumhee with her daughter Jiwon.
Kumhee with her daughter Jiwon. Source: Dijana Damjanovic/SBS News
하지만 금희 씨가 이렇게 바다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호주에 정착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최금희 씨: 제가 사실 바다를 많이 무서워했어요. 저희 가족이 바다에서 죽을 뻔한 경험이 있어서 거의 1년 동안은 바다의 바자도 얘기를 못했을 정도였거든요. 사실 그 이후에 한국으로 오고 저희 가정이 안정을 찾고 제가 제 남편을 만나고 아이를 만나고 가족을 이루면서 다 치유가 된 것 같아요. 지금 이제는 바다를 편하게 바라보게 돼요.

두 번을 떠나 마침내 집으로 선택한 이곳

금희씨가 바라는 호주에서의 삶은 단순합니다.

최금희 씨 : 호주에서요? 저는 호주에서 사실 오는게 딱 하나였어요. 저는 스트레스 안 받고 자연과 편안하게 살고 싶다. 아이랑. 지금도 그래요.

*해당 부분은 주호대사관 또는 영사관을 통해 따로 확인된 사실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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